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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누가복음 1장 26절~55절 마리아의 노래

by 주님의 장바구니 2020.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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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장 26절~55절 마리아의 노래


오늘날 사회 문제로 대두 되고 있는 수 많은 문제들 중 하나가 미혼모 문제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체, 가정을 이루지 못한체, 준비되지 않은 상태어서 엄마가 되고 아이가 태어 났을 때, 엄마나 아이나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최근 시작한 드라마 중 “동백꽃 필 무렵”이란 드라마가 있습니다. 우연히 이 드라마의 1회의 일부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동백이라는 자매는 결혼하지 않은 솔로인데, 아들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이 자매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보냅니다. 그리고 아이들 역시 이 아이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사회적 인식이 그만큼 좋지 않은 것이 미혼모에 대한 인식입니다. 오늘날도 이런데 예수님시대에 미혼모 라면 어떨까요? 유대인의 법에 의하면 결혼하기 전에 혼전 임신을 할 경우 공개석상에서 돌아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 처럼 예수님의 어머니는 혼인전 미혼모로 임신하여 출산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지난 두주 엘리사벳과 사가랴가 세례요한을 태에 품은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엘리사벳이 나이가 들어 경수가 끊어진지 오랜 상황에서 하나님은 엘리사벳과 사가랴 사이에 요한을 임신케 합니다. 사실 상식적으로 이해 되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놀라운 소식을 성경은 소개합니다. 바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 마리아가 임신을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30~31절에 보니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으니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름을 예수라고 지어라”라고 말합니다. 

 



가브리엘은 하나님 입장에서 기쁨의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날벼락입니다. 결혼하지도 않았는데 임신이라니 유대 사회에서 돌에 맞아 죽는 일입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34절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이 말을 듣고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임하심’이다. 그러자 마리아는 힘든 일이 될 수 있지만 천사의 말을 받아들입니다. 

 



마리아는 이 상황을 겪으며 놀랐습니다. 왜 남자도 알지 못하는 내게 이런일이 일어나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결국 순종합니다. 그 결과 가장 축복된 여인으로 기억됩니다. 

믿음의 자녀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마리아와 같은 상황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고 말씀하시는 방법들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말씀과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말슴하시기도 합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누구나 기뻐합니다. 그런데 시련과 고통이 있을 때는 누구나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면서 놀라고 불안해 합니다. 시련과 고통이 있을 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지 하나님께  반문합니다. 마리아가 처음에 그랬던 것입니다. 어쩌면 돌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일을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주었으니 하나님께 손가락질 할 이유는 충분한 것입니다. 고통과 고난이 있을 때 손가락 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고통과 고난이 있을때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반문하며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쏟아 놓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순종입니다. 받아들이면서 순종의 자세로 주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자는 하나님이 결론에 축복을 주십니다. 

오늘 저는 축복의 이야기는 주님의 몫이니 주님께 맞기고, 마리아가 임신하고 두려워 했을 일을 조금더 깊이 생각해 보면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 이당시  마리아 나이가 얼마나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보통 마리아를 머릿속에 떠올리라고 하면 성인 여인을 떠올립니다. 카톨릭의 성당 앞 마당에 세워둔 마리아 조각상이나 마리아의 여러 그림들을 보면 모두 성인 여인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때 마리아 나이는 최대 14세, 최소 12세입니다. 오늘날 결혼 적령기의 성인이 아니라 우리로 말하면 여중생 정도의 소녀입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남자가 12세가 되면 그 동안 가정에서 교육 받은 율법의 내용들을 성전에 가서 제사장들과 율법교사들 앞에서 검증 받습니다. 마치 우리가 세례를 받기전 성도들 앞에서 신앙고백을 하면서 검증 받는 것 처럼 이 검증에서 통과하면 성인으로 인정받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어린시절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갔다가 일주일 간 부모를 잃어버린 사건이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나이 12살 이었습니다. 성전에 가서 성인을 위한 검증을 받으러 갔던 것입니다. 이 당시 여자들의 경우엔 만 12세를 넘어 최대 14세 정도가 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소위 2차 성징을 통해 임신이 가능한 연령대가 최소 만12살 때부터 14살 때 까지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때를 기준으로 힘없고 돈없는 유대인들은 미리 정혼을 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12세 이상이면 율법의 기준으로 보아도 성인이고, 신체적으로도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보다 더 큰 이유는 당시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했는데 마치 우리나라 일제시대에 결혼을 하지 않은 자매를 붙들어 갔던 것 처럼 로마도 결혼하지 않은 어린 자매를 붙들어 가니까 부모들이 아이를 외국인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찍 결혼을 시킨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리아의 나이를 최소 만 12세 최대 14세로 추정합니다. 오늘날로 얘기하면 여중생입니다. 

어린 여중생이 임신을 했다는 것은 스스로 견디기 힘든 사건 이었을 것입니다. 천사가 말할때는 순간적인 믿음으로 아멘했지만 현실은 너무 두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어디간로 피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피한곳이 천사와의 대화속에서 등장한 친척인 엘리사벳의 집으로 간 것입니다. 

무거운 마음, 두려운마음, 혼란스러운 마음에 피할곳을 찾아 엘리사벳의 집으로 간 것입니다. 드디어 친척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나이 들어 여성의 기능이 끊어져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엘리사벳의 배가 천사의 말대로 임신 6개월이 되어 볼록 튀어 나온것입니다. 그것을 본 순간 마리아는 첫사의 말에 일점 일획도 틀리지 않음을 확인합니다. 

 

 

마리아를 본 엘리사벳은 마리아와 마리아의 배속에 있는 아이를 축복합니다. 
엘리사벳의 축복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47절부터 소위 “마리아 찬가”라는 노래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참 놀랍지 않습니까?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아이를 가지게 합니다.  또한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될 사람에게 아이를 갖게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라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마리아가 48절에서 노래하듯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자를 돌보신다”는 점입니다. 

마리아는 스스로를 ‘비천한 여종’으로 소개합니다. 여기서 ‘여종’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실은 여자를 가장 천박하게 부를 때 사용되던 용어가 본래 쓰였습니다. 그래서 여종이란 단어보다는 ‘계집’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마리아가 자기를 ‘비천한 계집’으로 고백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의지 할 수 없었던 자기 처지,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는 자기 처지를 하나님이 돌보셨다는 감격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감격과 감사의 찬송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사건은 마리아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습니다

 49절~53절입니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교회 다니는 많은 분들이 한 가지 오해하시는 게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관심을 끊고 구원에 대한 이야기만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 합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사회 문제를 이야기 하면 문제가 있는 목사처럼 치부합니다. 

어느 정도 일리도 있고, 이해도 가는 말씀들입니다. 왜냐하면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회 문제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목사가 강단에서 여당을 지지하거나, 야당을 지지하는 발언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상에 관심을 끊어야 할까요? 

성경은 과연 우리가 사는 사회에 관심이 없을까요?

출처 경안교회 담임목사 고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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