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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누가복음 설교

by 주님의 장바구니 2020.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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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설교 1장 5절~6절


제목: 기다리는 사람 (2부)

이 아비야 반에 속한 사람이 사가랴입니다. 오세푸스라는 역사서에 보면 이당시 제사장의 수는 1반당 평균 1000명 이었습니다. 1반당 1000명인데 24개반이면 평균 24000명이 제사장의 숫자 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제사장은 예배를 집례하기 위해 성전과 가까운 여리고에서 살았습니다. 

 



여리고에서 살던 제사장들 24000명 중에서 우리반 차례가 왔는데 우리반이 1000명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2명만 제비뽑기를 해서 1년에 두 번 한주동안 성전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러 가는 겁니다. 여러분 24000명중에 딱 한번 뽑힐 가능성이 있는데 이때 뽑히는 인원2명이면 뽑힐 가능성이 큽니까? 작습니까? 뽑힐 가능성이 거의 없는것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평생 예배를 인도해보지 못한 제사장들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제사장으로 예배를 집례하러 가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낮은 확률임에도 하나님의 섬리로 누가 헤롯왕때 예배를 집례하게 됩니까? 사가랴입니다. 그리고 이 사가랴의 부인도 제사장집안의 사람으로 이름이 엘리사벳입니다. 오늘 6절은 사가랴와 엘리사벳을 “의인”으로 표현 합니다. 의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 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단어의 형용사로 “디카이오이” 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같은 의인이라는 단어인데 형용사로 쓰일때 와 명사로 쓰일때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명사 - 신분 자체를 가르키는 것. ->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 사람
형용사 - 상태, 태도를 나타낼때 쓰는 말  ->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고 있는 사람

 



오늘 의인이라는 본문은 형용사로 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앞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의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지만 사가랴와 엘레사벳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가랴와 엘레사벳의 의로운 삶을 오늘 6절은 이렇게 표현 합니다.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암울했던 시기에 제사장들이 많이 타락합니다. 사사시대를 보면 레위인들이 첩을 두고 사는 내용이 나옵니다. 레위인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들이 세상풍조에 젖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뿐인가요?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직전 제사장들이 제사장 직을 이용해 하나님의 말씀아닌 것을 말씀인것 처럼 선포합니다. 암울하면 제사장들도 타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암울한 시대였음에도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계명과 규례를 지키며 의로운 삶으로 타협없이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그들은 기다리는 사람들 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기다렸습니까?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이 암울함을 바꿔주실 구원자를 보내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기다린 것입니다. 

 



여러분 약속을 믿고 기다린다는 어떤 의미일까요? 결혼한 신혼부부가 기도하면서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생기면 엄마 뱃속에 아이가 몇 달있다가 나옵니까? 10달있습니다. 산부인과 가면 10달 출산 예정일이 나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이가 아직 태어나기 한참 전임에도 부모가 어떻게 합니까? 신발을 삽니다. 아이 옷도 삽니다. 유모차도 삽니다. 아이 방도 꾸며줍니다. 아이가 반드시 10달후 태어날 것을 믿고 기다리니까 삶이 어떻습니까? 아이를 위한 삶으로 하나 하나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싶은것을 조금 포기하고 아이를 위해 투자합니다. 내가 먹고 싶은것, 누리고 싶은것 중요하지만 아이를 위해 양보합니다. 그게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삶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어떻게 암울한 시기에 신실하게 하나님앞에 설 수 있었을까요? 이들에게는 확실한 약속이 있었던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를 구원할 주님이 오신다. 이런 믿음이 있으니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준비하듯 하나님앞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도 하나님앞에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약속을 믿고 살아갑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승천하시면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오겠다. 재림을 약속하셨어요. 그런데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게 도적처럼 임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다시 오신다고 하셨지만 이것은 분명한 약속입니다. 우리가 이 약속을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는 아이를 품은 부모처럼 우리 삶이 약속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바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 주님 오시진 않을까 약속을 기다리면서 죄지를 짓지 않으려 합니다. 혹시 오늘 주님이 오시진 않을까 약속을 기다리면서 주님의 몸인 교회를 향해 헌신합니다. 내가 먹고 싶고, 내가 누리고 싶은것을 조금 양보해 주님의 몸인 공동체 사람들에게 나누게 됩니다.이웃을 배력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신실한 사람들은 항상 주님을 생각하고, 공동체를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합니다. 

저는 개척을 하고 그동안 처갓집에서 살았습니다. 저희 교회에 오기로 결정하고는 아직 부임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곧바로 어머니 명이로된 집을 팔아 이쪽으로 이사오려고 집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집이 계속 안빠지는 겁니다. 안빠지니 전세라도 내주고 오자고 마음먹고 전세도 내놓았습니다. 한참 소식이 없더니 몇주전에 소식이 오고 계약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사올 집도 계약했습니다. 아마 10월말이나 11월 초에 저부터 들어가 살것 같습니다. 

 



집을 내놓고 이사오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지금 살고 있는 처갓집에서 내가 필요해도  당장 필요하지 않으면 구지 구입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희 딸 하민이는 5만원 짜리 작은 테이블로 책상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하준이는 애시당초 책상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공부하는데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으니까 사주고 싶은겁니다. 그런데 처가집은 제가 계속 머물곳이 아니고 이쪽으로 이사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가 앞으로 계속 살 집에서 물건들을 사고 싶은 겁니다. 그곳에 투자하고 싶은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영원히 살 집이 이땅에 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하나님나라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성경은 우리에게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약속합니다. 다시말해서 저와 여려분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나라 백성입니다. 이땅은 제가 처갓집에서 잠시 몇 년 살았던 것처럼 우리가 잠시 머물 곳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머물 곳은 하나님나라입니다. 이 하나님나라의 약속을 믿는다면 당연히 영원한 것에 우리의 삶을 투자합니다. 놀러가는 일과 예배하는 일이 있다면 당연히 영원한것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영원한 것에 투자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디 되시길 축원합니다. 정말 신실하게 하나님앞에서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세벳이 그런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니 오늘 주님이 올것처럼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은 사가랴와 엘레시벳을 가리켜 의로운 행동을 계속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다시 오실것이라는 약속을 기다리십니까?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기다리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명사적 의인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형용사적 의인으로 살기 소원합니다. 영원한 것에 투자하며 사시길 소망합니다. 

출처 경안교회 담임목사 고원영

ⓒ Myriams-Fotos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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